콜럼버스보다 먼저 도착한 바이킹, 란세오메도스와 메인 페니의 증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역사 상식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이미 그보다 수백 년 전, 북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북아메리카 땅을 밟고 집을 짓고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남아 있는 란세오메도스 유적과 미국 메인주에서 발견된 노르웨이 동전, 메인 페니를 중심으로,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전설 같은 이야기 아니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와 과학적 분석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이건 상상이 아니라 검증된 역사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란세오메도스 국립 역사 지구
란세오메도스 국립 역사 지구 : 출처 위키피디아

바이킹은 정말 북아메리카에 왔을까?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도착은 문헌이 아닌 유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바이킹이 신대륙에 왔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문제는 “이야기만 있었지, 증거가 없었다”는 점이었죠.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 전해 내려오던 빈란드 사가(Vinland Saga)에는 레이프 에릭손이 서쪽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사가는 기본적으로 구전 설화에 가깝습니다. 역사가들이 늘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란세오메도스 유적의 발견

란세오메도스는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된 유일한 바이킹 정착지입니다.

1960년대, 캐나다 뉴펀들랜드 북단에서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라는 유적이 발견됩니다. 처음에는 원주민 유적 정도로 여겨졌지만, 조사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곳에서는 바이킹 특유의 잔디 지붕 주거지, 철을 제련한 흔적, 북유럽식 도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단순 방문이 아니라,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명확했습니다.

  • 연대 측정 결과: 11세기 초
  • 북유럽식 철 제련 흔적 발견
  • 노르웨이·아이슬란드 건축 양식과 일치

특히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은 이 유적이 콜럼버스 이전 약 500년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순간, 빈란드 사가는 전설이 아니라 역사 기록로 재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재현한 소규모 보트
재현한 소규모 보트 : 출처 위키피디아

빈란드는 어디였을까?

빈란드는 하나의 도시가 아닌, 북아메리카 동부 지역을 포괄하는 명칭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가 속 빈란드는 포도나무가 자라는 땅으로 묘사됩니다. 뉴펀들랜드에는 포도나무가 없기 때문에 한동안 논쟁이 있었습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란세오메도스가 전진 기지였고, 바이킹은 더 남쪽 지역까지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즉, 이곳은 “도착 지점”이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메인 페니, 동전 하나가 던진 질문

메인 페니는 바이킹의 북미 활동 범위를 넓혀주는 결정적 단서입니다.

1957년, 미국 메인주에서 한 소년이 뜻밖의 물건을 발견합니다. 바로 11세기 노르웨이 은화, 흔히 말하는 메인 페니였습니다.

이 동전은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었습니다. 금속 성분 분석과 문양 연구를 통해 노르웨이 왕 올랍 3세 시대의 동전으로 확인됩니다.

메인 페니 유사 동전
메인 페니 유사 동전 : 출처 위키피디아

동전은 어떻게 메인주에 왔을까?

자연 유입이 아닌, 사람의 이동을 전제로 해야 설명이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현대에 누군가 떨어뜨린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전은 원주민 유적층에서 발견되었고, 주변 환경과도 일치했습니다.

  • 현대 유물 혼입 가능성 낮음
  • 원주민 교역 유적과 함께 발견
  • 단독 발견이지만 맥락은 명확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렇습니다. 바이킹 → 원주민 → 교역을 통한 이동.

바이킹이 직접 메인주까지 갔는지, 아니면 교역망을 통해 동전이 이동했는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유럽 물품이 북아메리카 내부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왜 바이킹은 오래 머물지 못했을까?

기술이 뛰어났던 바이킹도 환경과 충돌 앞에서는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정도 기술력이면 왜 정착에 실패했을까?”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강한 집단도, 낯선 환경에서는 선택을 바꿀 수밖에 없으니까요.

원주민과의 갈등

사가에는 원주민과의 충돌 기록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사가 속에서 바이킹은 현지인을 스크렐링이라 부르며, 잦은 충돌과 긴장을 묘사합니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원주민과의 갈등은 소규모 정착 집단에게 상당한 부담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보급과 거리의 문제

유럽과의 거리는 바이킹에게도 넘기 힘든 벽이었습니다.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술을 가졌지만, 북아메리카는 여전히 보급이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 식량 자급의 어려움
  • 겨울 환경의 혹독함
  • 본국과의 긴 항로

결국 비용 대비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이킹은 현실적인 판단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란세오메도스와 메인 페니가 남긴 의미

신대륙의 역사는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란세오메도스 유적은 “유럽인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시점”을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메인 페니는 그 활동 범위가 생각보다 더 넓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 두 증거가 합쳐지면서, 우리는 역사를 단순한 발견의 연대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과 이동의 기록으로 보게 됩니다.

마무리하며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도착은 우연이 아닌, 증거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콜럼버스는 분명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는 점 역시 이제는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란세오메도스 유적과 메인 페니는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사의 틀을 조금 넓혀줍니다.

역사는 늘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발견으로 계속 수정되는 퍼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도 그 퍼즐의 중요한 한 조각입니다.


참고 자료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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